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두환/부정적 평가 (문단 편집) === [[독재]]와 철권 통치 === >'''"남한에서의 전두환에 대한 조롱은 재미를 위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생명에 위협을 주는 행위다."''' >'''"(Im Südkorea des Chon Doo Hwan geht es derzeit in der Tat nicht lustig zu, ist Spott lebensgefährlich.)"''' >---- >1980년 6월 29일 독일 [[슈피겔]] 기사 中 [[https://www.spiegel.de/politik/die-toten-sind-noch-nicht-gezaehlt-a-3ab9150a-0002-0001-0000-000014328503|#]][* 참고로 이 기사에는 1980년 6월 첫 주에만 [[서울]] 한 곳에서 무려 '''2,100명'''(대부분 학생)이 체포되었다는 것과 전두환이 [[10.26 사건]] 2주 뒤에 당시 한국군 장성 연봉이 미화로 환산하면 1만 달러였던 시절에 100만 달러 가격의 서울의 고급 외교관 별장을 인수받았다는 내용도 나온다.] 집권 초기 [[국보위]]를 굴려서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이 터졌을 때 군대를 동원해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공식 사망자만 160명을 넘어갔다. 게다가 이후에는 대한민국판 정치범 수용소인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무고한 사람들의 인권을 탄압해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89449|많은 사상자가]]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2/09/005000000200209162119391.html|나왔다.]] 1987년까지 7년간 구속된 시국사범([[양심수]]) 숫자는 인구의 0.03%에 육박하는 무려 '''12,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는 18년 동안 집권한 박정희 시절 양심수 수의 약 2.5배에 달하는 수치였다고 하며, 1970년대 대한민국의 양심수 수 총합이 정확히 2,704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수감된 셈.] 또한 자신의 최측근인 [[하나회]] 출신을 안기부장에 임명하며[* [[노신영]]은 제외] [[학림사건]], [[부림사건]],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공작, 야당 의원 포섭,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처럼 아주 굵직한 만행들을 벌였다. 물론 김대중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감형되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고, 김영삼은 자신의 집에서 가택연금되는 등 민주화 운동가도 많이 괴로워했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노동착취 등 인권탄압이 당연시됐으며 백일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걸리면 아기 이름을 따 ‘아람회’가 되고, 금강에 놀러 갔던 사람들이 걸리면 ‘금강회’가 돼서 반국가단체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정권에 항의하는 의미로 죽음을 택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광주 5.18의 참상을 알리는 글을 쓰고 투신자살한 서강대생 김의기, 노동3권 보장과 신군부의 광주시민 학살에 관련된 전단을 배포하고 분신자살한 노동자 김종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뒤 투신자살한 서울대생 김태훈 등이 있다. 반독재투쟁을 주도한 박관현 전 전남대학생회장의 경우 옥중에서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하였다. 전남대생 기혁은 독재정권의 교육정책 반대 투쟁 중 자살하였다. 의문사도 박정희 정권을 [[http://sarangbang.or.kr/kr/info/hrinput/hr_content.html?seqnum=5442&page=1&sepcode=g1&order=1&type=subject|거뜬히 능가할]] [[http://m.seoul.co.kr/news/newsView.php?id=19981211004004&cp=seoul|정도로 많았다]]. 1980년 7월 26일에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http://news.joins.com/article/1016079|임기윤 목사가 보안사에 연행된 뒤 숨졌고]], 1981년 1월 2일에는 서울대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진래 학생이 [[녹화사업(비밀 공작)|녹화사업]]의 일환으로 강제 입대당한 직후 [[http://contents.archives.go.kr/next/search/showDetailPopup.do?p_current_page=1&rc_code=1310377&rc_rfile_no=200600068062&rc_ritem_no=|자살로 위장한 타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http://contents.archives.go.kr/next/archive/popArchiveEventList.do?page=4&archiveId=0002049035|맞이했으며]] 학생운동가인 서울대생 노진수는 [[http://sisapress.com/journal/article/79478|1982년 정권에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같은 해 7월엔 연세대생 정성희가 강제징집된 뒤 보안사 녹화사업 과정에서 갑자기 죽었으며[*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tcct&levelId=tcct_1983_07_23_0020|참고링크1]]][*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364.html|참고링크2]]], 1983년에는 성균관대생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tcct&levelId=tcct_1986_05_02_0020|이윤성]], 고려대생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06/2004/02/005100006200402242203595.html|김두황]], 한양대생 한영현, 동국대생 [[http://www.kdemo.or.kr/notification/calendar/page/52/post/856?|최온순]], 서울대생 [[http://news.donga.com/List/Se/3/all/20020626/7836642/1|한의철]]이 마찬가지로 강제징집된 뒤 의문사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여성운동에 앞장선 정은복[* 주부아카데미협의회 회장 등으로 일하다 고정간첩 색출 조사를 받고 나온 뒤 사라졌다.]이 [[http://www.nocutnews.co.kr/news/20189|행방불명돼]] [[http://contents.archives.go.kr/next/archive/popArchiveEventList.do?archiveId=0002049029|의문사]] [[http://contents.archives.go.kr/next/archive/popArchiveEventList.do?archiveId=0002021599|처리됐다]]. 그 다음 해에는 학생운동을 하다 군에 입대한 연세대생 임용준[* 불법으로 북한에 가서 물의를 빚었던 [[임수경]] 전 의원의 오빠.]이 녹화사업과 관련해 의문사당하였다. 85년 10월 11일에는 서울대생 우종원이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민추위 사건]]으로 대공과의 수배를 받아오다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101189|경부선 철로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86년에는 신호수[* 서울 서부서 대공과에 연행된 뒤 시신으로 발견됐다.], 김성수[* 정부 관계자에게 끌려갔다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나왔다.], 87년에는 서울대생 김용권과 최우혁[* 사회과학서적을 읽다 보안대에 걸렸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부산대생 이승삼과 박필호, 전남대생 이이동[* 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다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이 군대에서 의문사하였으며 노조원 정경식,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환 등 전두환 시기에 의문사한 사람은 수없이 많다.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한 뒤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한 부산대생 최종철, 재소자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다 교도관 폭행으로 숨진 삼청교육대 재소자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00000000162/3/70000000000162/20010625/7706887/1|박영두]], 경찰의 구타로 숨진 뒤 행려병자로 신분이 조작돼 해부용 시신으로 팔려나간 버스기사 문영수,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행으로 숨진 노동자 김상원, 예비군 훈련 도중 광주 학살에 대해 발언했다가 고문당해 죽은 [[http://www.mpmbc.co.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149601&sca=9%EC%8B%9C%EB%89%B4%EC%8A%A4%EB%8D%B0%EC%8A%A4%ED%81%AC|장이기]], [[정연관 상병 구타 사망사건|대통령 선거 군부재자 투표에서 야당을 찍었다고 부대에서 구타당해 숨진]]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4/1949962_13456.html|정연관]] 등도 사망했다. 이런 전두환도 아는지 유럽의회의 인권침해국 명단에서 한국을 빼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유럽순방에 앞서선 회담에서 인권 문제가 거론되지 않도록 사전에 작업한 정황도 담겼다. 서독 방문을 앞두고는 행여 교민들이 반정부 시위를 할까 봐 미리 '알박기' 집회 신고를 할 정도로 치밀했다고 외교 문서에서 드러났다.[[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178046|#]] 더 아이러니 한 것은 1988년 1월 6일 방한한 스티븐 솔라즈 미 하원의원과 면담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했고 이것이 한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는 점이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331500052&wlog_tag3=naver|#]]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정치권 내부의 절충주의 세력을 제압하는 등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들도 어김없이 억압했다. 쿠데타 당시에는 [[삼김]]이 연금 조치 당했으며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유성환 국시론 파동]]이 대표적인 예시다. [[김용남(1950)|정치깡패]]를 동원하며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